1. 소설 목민심서 블로그를 소개합니다.

나령 윤기도 2022. 2. 13.

 

 

소설 목민심서

목민을 알면서도 목민을 하지 않는것은 더욱 목민을 힘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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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령 윤기도]----어떻게 써 내려가면 누구나 좋아할까 곰곰히 생각을 하다가 드디어 펜을 들었다.
소설 목민심서의 핵심내용을 중간 중간 살펴보면
이런 글귀를 볼 수 있다.

다산 정약용 다산사당 출처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은 제 힘으로 먹고 살면서 제 일을 경영하되 제 피땀으로 제가 먹으니 하늘이 살펴봄에도 오히려
너그로울 것이요, 부유하고 귀한 사람은 벼슬을 가지고 녹을 먹되 만민의 피땀을 한 사람이 먹으니 하늘이 그 허물을 감독 
하심이 더욱 엄정할 것이다."
 
여기 이 이야기들은 다산 정약용 하룻밤에 읽는 목민심서 중 한 대목이다.

다산 정약용은 1762년 광주군 마현에서 진주목사로 지낸 정재원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정약용은 어릴적부터 영특하기로 소문나 있섰고 4세에 이미 천자문을 익혔고, 7세에 한시를 지었으며, 
10세 이전에 이미 자작시를 모아 삼미집을 편찬했섰다고 한다.
어릴적 스승은 부친이었고 10세 나이에  經史를 읽기 시작하고, 16세에 성호 이익선생의 유고를 읽었다고 한다.
성장기를 거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고 관리를 지낸 7년을 거쳐 정조가 죽자 천주교

탄압사건(신유교옥)으로
강진으로 18년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유배생활 기간 중 다산은 자신의 학문을 연마해 목민심서 등
500여권의 방대한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를 받게 되었다.
 
1818년 고향 남양주로 돌아온 정약용은 회갑을 맞은 1822년에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었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광중본(壙中本) “이는 열수(洌水) 정용(鄭鏞)의 묘이다. 본명은 약용(若鏞), 자를 미용(美鏞), 호를 사암(俟菴)이라 한다.
아버지의 휘(諱)는 재원(載遠)이다. 음직(蔭職)으로 진주목사에 이르렀다. 어머니 숙인(淑人)은 해남윤씨(海南尹氏)이다.
영조(英祖) 임오년(1762년) 6월16일에 약용을 열수(洌水 한강의 별칭)가의 마현리(馬峴里)에서 낳았다.
22세(정조7, 1783년)에 경의(經義)로 생원(生員)이 되고 여문을 전공하여 28세(정조13년, 1789년)에 갑과의 제2인으로 합격
대신의 선계로 규장각에 배속되어 월과문신에 들었다가 곧 한림에 선입되어 예문관 검열이 되고 승진하여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홍문관의 수찬과 교리, 성균관 직강, 비변사 낭관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경기 암행어사가 되었다.
을묘년(정조19, 1795년) 봄에 경모궁 상호도감 낭관의 공로로 사간에서 발탁되어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고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오르고 병조 참의가 되었다.

가경 정사년(정조21, 1797년)에 곡산부사로 나가서 혜정(惠政)이 많았다. 기미년(정조23, 1799년)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승지를 거쳐 형조 참의가 되어서 원옥(寃獄)을 다스렸다. 경신년(정조24, 1800년) 6월 달에 「한서선(漢書選)」을 하사받았다.
이 달에 정종대왕이 승하하니 이에 화(禍)가 일어났다.

 

다산 정약용유적지 출처



15세(영조52, 1776년)에 풍산홍씨(豊山洪氏)에게 장가드니 무승지 화보의 딸이다. 장가들고 나서 서울에 노닐 때 성호
이익선생의 학행(學行)이 순수하고 독실함을 듣고 이가환과 이승훈 등을 따라 그의 유저(遺著)를 보게 되어 이로부터
경적(經籍)에 마음을 두었다.

상상(上庠)하여 이 벽을 따라 노닐면서 서교(西敎)의 교리를 듣고 서교의 서적을 보았다.
정미년(정조11, 1787년) 이후 4~5년 동안 자못 마음을 기울였는데, 신해년(정조15, 1791년) 이래로 국가의 금지령이
엄하여 마침내 생각을 아주 끊어 버렸다. 을묘년(정조19, 1795년) 여름에 중국의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가 오니
국내가 흉흉하여졌다. 이에 금정도 찰방(察訪)으로 보임되어 나가 왕지를 받아 서교에 젖은 지방의
호족을 달래어 중지시켰다.

신유년(순조1, 1801년) 봄에 대신(臺臣) 민명혁 등이 서교의 일로써 발계하여, 이가환·이승훈 등과 함께 하옥되었다.
얼마 뒤에 두 형인 약전과 약종도 약용과 함께 체포되어 하나는 죽고 둘은 살았다. 모든 대신(大臣)들이 백방의 의를
올렸으나 오직 서용보만이 불가함을 고집하여, 약용은 장기현으로 정배되고, 약전은 신지도로 정배되었다.

가을에 황사영이 체포되자, 악인 홍희운·이기경 등이 갖은 계책으로 약용을 죽이기를 도모하여 조지를 얻으니,
약용과 약전이 또 체포당하였다. 일을 안찰한 결과, 황사영과 관련된 정상(情狀)이없으므로 옥사가 또 성립되지 않았다.
태비(太妃) 작처(酌處)를 입어 약용은 강진현으로, 약전은 흑산도로 정배되었다.

계해년(순조3, 1803년) 겨울에 태비가 약용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는데, 상신 서용보가 그를 저지하였다.
경오면(순조10, 1810년) 가을에 아들 학연의 명원으로 방축 향리(방축향리)를 명하였으나 당시 대계(臺啓)가 있음으로
인하여 금부에서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 뒤 9년 만인 무인년(순조18, 1818년) 가을에 비로소 향리로 돌아왔다.
기묘년 겨울에 조정 논의가 다시 약용을 등용하여 백성을 편안히 하려 하였는데, 서용보가 또 저지 하였다.

약용이 적소(謫所)에 있은 지 18년 동안에 경전(經典)에 전심하여「시(時)」, 「서(書)」, 「예(禮)」, 「악(樂)」, 「역(易)」,
「춘추(春秋)」 및 사서(四書)의 제설에 대해 저술한 것이 모두 2백30권이니, 정밀히 연구하고 오묘하게 깨쳐서
성인의 본지를 많이 얻었으며, 시문을 역은 것이 모두 70권이니 조정에 있을 때의 작품이 많았다. 국가의 전장(典章)
및 목민(牧民)·안옥(按獄)·무비(武備)·강역(疆域)의 일과 의약·문자의 분변 등을 잡찬(雜纂)한 것이
거의 2백 권이니, 모두 성인의 경(經)에 근본 하였으되 시의(時宜)에 적합하도록 힘썼다. 이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혹
채용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포의(布衣)로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어, 정조대왕의 총애와 가장(嘉獎)이 동열(同列)에서 특이하였다.
그래서 전후에 상사(賞賜)로 받은 서적·내구마·문피 및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 등은 이루 다 적을 수 없을 정도다.
기밀에 참여하여 소희가 있으면 필찰(筆札)로 조진(條陣)하도록 하여 모두 즉석에서 들어 주셨다.
항상 규장각·홍문관에 있으면서 서적을 교정하였는데 직무의 일로 독려하고 꾸짖지 않으셨다.
밤마다 진찬을 내려 배불리 먹여주시고 무릇 내부(內府)의 비장된 전적을 감각을 통하여 보기를 청하면 허락해 주셨으니,
모두 특이한 예우이다.

그 사람됨이 선(善)을 즐기고 옛것을 좋아하며 행위에 과단성이 있었는데 마침내 화를 당하였으니 운명이다.
평생에 죄가 하도 많아 허물과 뉘우침이 마음속에 쌓였었다. 금년에 이르러 임오년(순조22, 1822년)을 다시 만나니
세상에서 이른바 회갑으로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이다. 마침내 긴치 않은 일을 씻어 버리고 밤낮으로 성찰하여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회복한다면 지금부터 죽을 때 까지는 거의 어그러짐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까지가 경기여행지 다산 정약용생가 방문편 집현]
 
[나령 윤기도]
그리고 또 다산은 경고를 한다.
"다른 벼슬은 구해도 목민의 벼슬은 구하지 말라."
"수령이 잘못하면 백성들이 겪는 폐해가 너무 크다. 다시 말해서
"비록 덕이 있더라도 위엄이 없으면 잘할 수 없고, 뜻이 있더라도 밝지 않으면 잘할 수 없다."
 
공직자의 됨됨이는 한가지만 좋다고하여 다 되는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만 좋아서도 안되고 통솔력이 있어야하며, 잘 해보겠다는 뜻만가지고는 안 되고 업무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나 또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