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이너/꺼리

목민심서 6편

나령 윤기도 2022. 11. 13.

川流逕縣, 鑿渠引水, 以漑以灌, 與作公田, 以補民役, 政之善也.
[천류경헌, 착거인수, 이개이관, 여작공전, 이보민역, 정지선야.]
냇물이 고을을 지나가면 수로를 파서 물을 끌어 논에 대고,

아울러 공전(公田)을 개간하여 백성의

요역을 덜어주는 것이야말로 선정이다

독립운동 총사령관 박상진 사저



許晩石燕岐縣監,爲 縣北十五里, 作大隄, 穿渠灌注千餘頃. 堤在淸州之境,

其始築也, 晩石親督之, 淸人千百爲羣, 發不遜語, 折晩石所據胡床. 晩石彎弓逐之,

淸人不敢近. 堤成, 民賴其利, 至今稱頌.
[허만석연기현감,위 현북십오리, 작대제, 천거관주천여경. 제재청주지경, 기시축야,

만석친독지, 청인천백위군, 발불손어, 절만석소거호상.

만석만궁축지, 청인부감근. 제성, 민뢰기리, 지금칭송.]
허만석(許晩石)이 연기현감(燕岐縣監)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고을의 북쪽 15리 지점에 큰 제방을 만들고

수로를 뚫어 1,000여 경의 논에 물을 대게 하였다.

독립운동 총사령관 박상진 사저


제방이 청주(淸州)와의 경계에 있었다.
이 제방을 처음 쌓을 때 그가 친히 감독하였는데, 청주 사람들이 1,000명,

100명 떼를 지어 불손한 말을 퍼붓고

허만석이 앉았던 평상을 파손했다.
이에 그가 활을 당겨 쫓으니 청주

사람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제방이 이루어져 백성들이 그 이득을 입게 되자

도리어 지금까지도 칭송하고 있다.
<출처 : 다산연구회 창비출판사>

 

1인 크리에이터 시대

21세기는 1인 크리에이터 시대 유진공주님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syskido.tistory.com

 

부분 해설

임지 백성의 기근을 해결하라는 당부를 받은 허만석 현감은 현지에 와서

상황을 살핀 후 치소가 있는 연기에서 15리 북쪽 지역이 미호천 조천 범람원

임을 파악하고 이를 안정적인 농토로 바꾸는 사업을 하게 된 것이다.
조치원 평리, 상리, 죽림 일대에 제방을 쌓고, 지금의 조치원고 뒤쪽으로 보를 만들어

새로운 제방과 저수지를 만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행정구역상 건너편 청주목 주민들의 항의를 감수하면서까지 진행을 한 것이다.
이런 작업의 일환으로 얻은 농지가 1천경(현재 환산 면적 25㎢)이라한다.
목심심서에서 정약용은 이 부분을 높이 사던 것이다.
농경지의 확장과 안정적인 농수 확보는 백성에게 근본적인 삶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처음의 조치원 모습은 띠풀 뗏장으로 된 자연제방의 모습으로 추정 할 수 있다.

이런 물길을 막은 제방이 시간이 흐를수록 부강에서 삼남대로로 가는 징검다리 같은 길의 역할도 겸하게 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강외면 쪽과 조치원 쪽으로 길이 표시된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 발길이 잦아들면서 아직 소유관계가 확실치 않은 이곳이 삶터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임시 집터가 되기도 하였다.

상리에 가면 뗏집거리라는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점차로 제방이 길이 되고,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점점 정착하면서 행정에게도

이 곳에 관영 숙소인 원(院)을 설치하게 된다. 동국여지승람(1481년,성종12년)에

청주목 역원 편에 청주에서 서쪽으로 39리에 장원(場院)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길손의 쉼터나 시장의 기능을 한 것 같다.

 

"세종대왕, 조치원 만든 얘기 목민심서에 나온다" - 세종의소리

목민심서 제6편(공조) 제2조(수리시설)川流逕縣, 鑿渠引水, 以漑以灌, 與作公田, 以補民役, 政之善也.(냇물이 고을을 지나가면 수로를 파서 물을 끌어 논에 대고, 아울러 공전(公田)을 개간하여

www.sjsori.com

 

저작권자 © "세종의소리" 출처임을 밝힘니다.

 

댓글